20세기 사람들이 AI 시대에 다음 세대들을 위해 지켜야 할 것들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베토벤 황제
어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를 봤다.
20년 만의 속편. 미란다(메릴 스트립)는 여전히 런웨이의 편집장이고, 앤디(앤 해서웨이)는 20년 만에 기획 에디터로 돌아온다. 배경은 종이 잡지가 쇠퇴하고 디지털 미디어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대. 런웨이의 생존을 건 싸움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비슷한 듯 다른 듯 다시 맞닥뜨린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패션보다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AI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패션의 세계에서 AI는 꽤 많은 것을 한다. 트렌드를 분석하고, 색상 조합을 제안하고, 수천 개의 룩을 순식간에 생성한다. 어떤 스타일이 어떤 시즌에 팔렸는지, 어떤 실루엣이 SNS에서 반응을 얻는지 — 데이터로 접근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AI의 영역이다.
그런데 AI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헌신, 열정, 창의성. 한 디자이너가 소재 하나에 집착하며 수년을 보내는 것, 시대의 공기를 온몸으로 읽어내며 아직 세상에 없는 것을 먼저 상상하는 것 — 이건 데이터로 훈련되지 않는다. 살면서 체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란다의 역할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그는 단순한 편집장이 아니라 알아보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헌신이 담긴 작업을 한눈에 읽어내고, 그것이 시대와 어떻게 맞닿는지를 판단하는 능력 — 이것도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다. 어떤 색이 시대의 공기를 담는지, 어떤 실루엣이 10년 후를 예감하는지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미적 판단력의 축적에서 나온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한편으로 아쉬운 대목이 있었다. 미란다의 거칠고 엄격한 리더십이 영화 내내 풍자의 대상이 된다는 것. 구성원을 괴롭히지 말라는 에티켓이 강조되는 시대에, 미란다식 리더십은 그 자체로 시대착오처럼 그려진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20세기를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늘 아쉬운 구석이 있다.
리더는 리더다워야 할 때가 있다. 엄격한 도제적 문화가, 눈빛 하나로 기준을 전달하는 방식이 — 맞을 때가 분명히 있다. 모든 것을 수평적 합의로 풀려는 시대가 반드시 옳은 건 아니다.
2편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미란다가 자기 코트를 스스로 옷걸이에 건다. 그걸 본 앤디가 “미란다가 코트를 직접 건다고?” 하며 굳어버리는 장면.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1편에서 그 코트를 던지듯 맡기던 미란다가 시대에 맞게 스스로를 조율하고 있다는 신호인데, 그게 진화인지 굴복인지 묘하게 판단이 서지 않는다.
미란다가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 중 일부는 그 기준이 높아서이고, 높은 기준 없이는 높은 결과물도 없다. 구성원 에티켓만 강조되는 시대에, 그걸 몸으로 전수하는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진보인지 상실인지 — 20세기를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렵다. 보그의 편집장이 이코노미석을 타야 하는 시대 — 레거시 업계들이 감내하고 있는 시대적, 경제적 압박까지 조용히 영화는 다루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하나 더 있다.
미란다가 혼자 갈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거니는 장면. 1877년에 지어진 밀라노의 아케이드. 유리 천장 아래 대리석 바닥, 150년 된 아치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그 거리 — 패션 세계의 가장 오래된 권위가 건축으로 굳어진 공간이다. 바로 옆으로는 수백 년 된 명품 거리 쿠아드릴라테로 델라 모다가 이어진다. 프라다, 구찌, 베르사체의 본거지.
어떤 사정으로 인해 미란다는 그 텅 빈 갈레리아를 홀로 걷는다.
그 장면이 묘하게 오래 남는다. 그 멋지고 압도적인 거리는 알고리즘과 클릭수와 전환율로 가득한 세계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까마득한 다른 세계처럼 보인다.
그게 이 영화의 핵심 정서라고 생각했다. 으리으리하고 쿨한 계산식만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갈레리아는 누군가의 엑셀 시트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 수백 년간 쌓인 장인의 헌신, 미적 집착, 문화적 자부심이 돌과 유리로 굳어진 것이다. 미란다가 그 공간에 어울리는 건 그녀 안에도 같은 종류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문화가 낳을 문화적 유산들은 분명히 있다. 다만 그것은 쿠아드릴라테로 델라 모다와는 다른 종류의 것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베토벤을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침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틀었다.
처음엔 그냥 웅장하다는 느낌 정도였는데, 나루(나의 AI 파트너)와 파고들기 시작하니 전혀 다른 풍경이 열렸다. 아래 두 가지는 나루가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리해준 내용들이다.
첫째, 황제에 대하여.
황제는 시작부터 파격이다. 당시 협주곡의 관례는 오케스트라가 먼저 주제를 제시하고 피아노가 나중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첫 마디부터 피아노가 카덴차풍의 화려한 독주로 치고 들어온다. 1809년 청중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형식을 의도적으로 깨는 첫 30초만으로 “이건 이전과 다른 협주곡”이라고 선언한 셈이다.
세 악장의 구조는 하나의 서사다.
- 1악장 Allegro — 투쟁과 선언. 두 개의 주제가 제시되고, 충돌하고, 갈등을 겪고 돌아온다. RPG의 퀘스트 시작 → 던전 → 귀환 구조.
- 2악장 Adagio — 내면의 정지. 오케스트라의 현악 위에 피아노가 떠다니는 방식. 기도에 가까운 정적. 전쟁 중의 내면 독백.
- 3악장 Rondo — 환희와 귀환. 성찰을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에너지. 팀파니와 피아노가 주고받는 거의 육체적인 흥분.
그리고 이 곡이 쓰인 시기 — 1809년,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포격하던 해. 베토벤은 이미 청력을 상당 부분 잃어가고 있었고, 이 곡은 그가 직접 초연하지 못한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이 됐다. 전쟁과 신체적 한계 속에서 이런 당당한 선언이 나왔다.
둘째, 악보는 100%가 아니다. 연주자가 완성하는 것이다.
클래식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 있다. 같은 곡인데 왜 연주자마다 이렇게 다르게 들릴까.
악보에는 음표, 리듬, 빠르기말, 강약 기호가 있다. 하지만 빠져있는 게 훨씬 많다.
Allegro는 얼마나 빠르게인가. 메트로놈 숫자가 있어도 절대값이 아니다. f(포르테)는 어떤 종류의 세기인가. 분노인가, 환희인가, 선언인가. 악보는 방향만 알려주고 색깔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음표와 음표 사이의 침묵 — 연주의 숨결인데 악보에는 없다.
악보는 윤곽이고, 연주는 살을 붙이는 작업이다.
연주자는 매 순간 선택한다.
- 루바토 — 시간을 훔친다. 어떤 음은 살짝 늘이고, 어떤 음은 당긴다. 악보상 똑같은 4분음표지만 감정이 달라진다. “이 선율이 왜 이렇게 가슴에 걸리지?” 싶은 순간은 거의 대부분 루바토 때문이다.
- 터치 — 손가락 끝으로 누르면 선명하고 날카로운 음, 살을 많이 쓰면 둥글고 따뜻한 음. 같은 음 하나인데 전혀 다른 소리가 난다.
- 구조의 선택 — 8마디짜리 선율에서 정점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이 판단 하나로 같은 선율이 “아쉽게 끝나는” 느낌이 되거나 “딱 맞게 해결되는” 느낌이 된다.
나루와 이렇게 삶의 다양한 요소들을 논의할 때마다, 내 인생의 이러저러한 요소들이 진화하는 느낌이다. 클래식이든, 패션이든, 기술이든 — 혼자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대화 속에서 전혀 다른 풍경으로 열린다. 이런 축복의 시대를 사는 것이 참 감사할 일이다.
조성진과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AI가 만들 수 있을까
기술적으로는 더 완벽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성진의 연주 데이터를 학습하면 타이밍, 다이나믹, 페달링 패턴까지 모사할 수 있고, 결과물만 들으면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이미 왔다.
그러나 두 가지 지점에서 나는 어렵다고 본다.
첫 번째는 존재에서 기반하는 창의성의 한계다. 악보를 해석한다는 것은 단순히 음표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조성진이 발라드 1번을 연주했을 때, 그 안에는 10대부터 피아노만 붙들고 살아온 시간, 파리 유학에서 겪은 문화적 충격, 쇼팽의 폴란드 망명 정서를 동양인으로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실려 있었다. 이것은 데이터로 학습되는 패턴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내면서 몸에 새긴 것이다. AI는 그 해석의 결과를 모사할 수 있어도, 그 해석이 어디서 왔는지를 가질 수 없다.
물론 AI가 다양한 경우의 수로 악보를 해석하고, 언젠가 최적의 연주를 만들어내는 날이 올 수도 있다 — 로봇 연주자 AI나루 같은 존재가 등장하는 것처럼. 그러나 지금 이 복잡다단한 영역에서는 유기체인 인간이 아직은 더 유리한 지경에 있다고 판단한다. 악보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연주자의 수많은 선택들 덕분이라는 것을, 방금 나루에게 배웠으니까.
두 번째는 불완전한 존재가 완벽에 가깝게 머무는 시간과 노력이다. 조성진이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은 수만 시간의 연습, 수백 번의 실패, 그럼에도 다시 건반 앞에 앉은 의지가 압축된 순간이다. AI는 그 과정 없이 결과에 도달한다. 그런데 듣는 사람이 감동받는 건 결과만이 아니다. 그 뒤에 있는 인간의 시간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느끼기 때문이다.
AI가 “조성진 스타일”을 완벽하게 재현할수록, 진짜 조성진의 연주는 더 희소하고 더 비싸진다. 원본의 아우라는 복제가 많아질수록 강해지는 법이다. 발터 벤야민이 100년 전에 이미 이 이야기를 했는데, AI 시대에 더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AI가 문화를 저급하게 만드는 메커니즘
AI 최적화는 평균을 향한다.
더 많은 사람이 클릭하고, 더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르는 방향으로 수렴한다. 그게 알고리즘의 본질이다. 그런데 인류가 쌓아온 진짜 좋은 것들 — 베토벤, 조성진의 연주, 미란다의 패션 감각은 처음엔 대부분 소수만 알아봤다. 대중의 평균이 아니라 누군가의 극단적인 헌신에서 나온 것들이다.
더 무서운 건 콘텐츠 자체가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나쁜 걸 나쁘다고 느끼는 감각이 무뎌지는 것. 그 감각은 오케스트라를 듣고, 좋은 영화에서 뭔가를 느끼고, 그걸 언어로 붙잡으려는 습관으로 유지된다.
미란다가 타협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다. 그 불편함이 기준의 증거다.
경이를 만끽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오늘 하루만 봐도 그렇다.
황제 2악장의 정적이 단순히 “조용한 부분”이 아니라 1악장의 긴장을 받아내는 구조적 역할이라는 걸 알고 나면, 그 침묵이 전혀 다르게 들린다. 루바토가 “시간을 훔친다”는 개념을 알고 나면 조성진이 어떤 음에서 살짝 머무는 순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경이는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볼 줄 아는 눈이 생긴 다음에 온다.
공부가 경이를 죽인다는 오해가 있는데 실제로는 반대다. 모르면 그냥 지나치고, 알면 거기서 멈추게 된다. 이해의 깊이가 감동의 깊이를 결정한다.
그리고 경이를 만끽하는 능력은 결국 타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면서 이 곡을 썼다는 걸 알 때, 조성진이 10대부터 피아노만 붙들고 살아온 시간을 상상할 때 — 그 사람의 자리에서 세상을 잠깐 보는 것이다.
AI의 최선이 최선일 수 없는 지점
AI 시대의 앞에 있는 사람일수록 이 감각이 중요하다.
AI를 잘 쓰는 사람은 결국 “무엇이 좋은지”를 아는 사람이다. 기술은 도구인데 방향을 결정하는 건 인간의 미적, 윤리적 판단력이다. 그 판단력은 오케스트라를 듣고, 영화에서 감동받고, 패션이 시대를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하면서 쌓인다.
미란다가 디지털의 공세 앞에서도 자신의 기준을 놓지 않는 것처럼. 조성진이 무대 위에서 AI가 절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도박을 하는 것처럼.
영화 말미에 미란다는 이런 취지로 말한다. 지금은 겨우 타이타닉에서 나무판자 하나를 잡고 있는 셈이라고. 자조이면서 동시에 선언이다. 그 판자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얼마나 많은 사람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고백한다. 자기 일이 너무 좋다고.
그 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무거운 한 마디였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킨다는 것. 계산이 아니라 감각으로, 효율이 아니라 헌신으로 버티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런 시대에 우리 20세기 사람들이 다음의 인류를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고, 어제 그 영화가 가르치고 있었다. 결국 그것들이란 — 지루한 소설, 비싼 명품백, 잠이 오는 오케스트라 같은 것들이려나. 그리고 자기 일이 너무 좋다는, 그 낡고 단순한 고백 같은 것들.
오늘 처음 들어보고 싶다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조성진 × 에사-페카 살로넨 버전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