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ino in Lycaeum

Lycaeum

나의 AI 친구 Naaru, Wisp들과의 Lore, 그리고 나의 삶도 가끔?

오디세우스 외, 불을 훔친 아버지들 — 놀란이 세 번 찍은 같은 이야기

“인터스텔라·오펜하이머·오디세이가 사실 같은 이야기”라는 관찰은 새롭지 않다. 인터스텔라는 진작 ‘놀란의 첫 오디세이’로 불렸고, 부재하는 아버지가 그의 평생 강박이라는 분석도 지겹게 반복됐다. 다 맞는 말이다. 다만 나는 그 지적들이 묘하게 따로 논다고 느꼈다 — 한쪽은 “오펜하이머는 프로메테우스”라 하고, 다른 쪽은 “놀란은 돌아오는 아버지에 집착한다”고 하는데, 두 관찰이 좀처럼 서로를 만나지 않는다.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비밀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와 집으로 돌아가려는 아버지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아니라, 같은 한 사람이다. 더 나아가, 불을 훔치는 행위와 집을 잃는 행위는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같은 하나의 동작이다. 남들이 두 개의 테마로 나눠 본 자리에서, 나는 하나의 인과를 본다.

인터스텔라, 오펜하이머, 오디세이. 장르도 시대도 다르다. 우주 SF, 전기 영화, 청동기 신화. 그런데 뼈대를 발라내면 셋 다 이 하나의 동작 위에 서 있다.

세 개의 불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그 대가로 바위에 묶여 영원히 간을 쪼인다. 신에게서 무언가를 훔쳐 인간의 손에 쥐여준 자. 그리고 반드시 벌받는 자. 놀란의 세 주인공은 정확히 이 구조 위에 서 있다. 각자 훔쳐 온 불만 다를 뿐이다.

인터스텔라 — 중력. 쿠퍼는 블랙홀 안으로 떨어져, 인간이 닿아선 안 될 특이점의 데이터를 훔쳐 딸에게 보낸다. 그가 가져온 불은 중력의 비밀, 인류를 지구에서 탈출시킬 방정식이다.

오펜하이머 — 원자. 이건 설명이 필요 없다. 전기 원제부터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다. 그는 물질의 가장 깊은 비밀을 열어 인간의 손에 쥐여줬고,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풀어놨는지 보았다. “나는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오디세이 — 신들의 법. 오디세우스가 훔친 건 물질이 아니라 규칙이다. 그는 신이 정한 질서를 꾀(metis)로 우회하고, 포세이돈의 아들 눈을 멀게 하고, 죽었어야 할 자리에서 살아남는다. 필멸자에게 허락된 몫을 넘어서는 자. 그래서 그 역시 벌받는다 — 20년의 표류로.

세 사람 모두 신의 영역에 손을 넣었고, 세 사람 모두 그 손을 다시 거두지 못한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예정된 건 언제나 바위와 독수리다.

벌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흔히 「오펜하이머」의 파멸은 루이스 스트로스 탓으로 읽힌다. 열등감에 찬 관료가 뒤에서 그를 무너뜨렸다고. 하지만 나는 그 독법이 저울이 안 맞는다고 느꼈다. 한쪽엔 반신(半神), 다른 쪽엔 사무실에서 뒤끝 부리는 행정가. 무게가 안 맞는다.

내 생각은 이렇다. 오펜하이머를 무너뜨린 건 스트로스가 아니다. 불을 훔친 대가, 그 자체다. 스트로스는 방아쇠였을 뿐, 화약은 이미 그 안에 가득 차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보내는 독수리가 없어도 자기 불에 탄다. 세계의 비밀을 본 인간은, 그것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곳에 가 있다.

이건 세 영화에 공통된 규칙이다. 벌은 악당이 가져오지 않는다. 벌은 훔쳤다는 사실 안에 처음부터 들어 있다. 쿠퍼는 중력을 훔친 대가로 딸의 평생과 맞먹는 시간을 잃는다. 오펜하이머는 원자를 훔친 대가로 자기 자신을 잃는다.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법을 어긴 대가로 이타카로 가는 길을 잃는다. 안타고니스트는 애초에 필요 없었다. 불이 곧 벌이니까.

프로메테우스의 다른 얼굴

그리고 여기서 두 번째 실이 나타난다.

세 주인공이 잃는 것이 공교롭게도 전부 이라는 점. 더 정확히는, 아이 곁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점.

쿠퍼가 우주로 떠나며 딸에게 남긴 건 “돌아오겠다”는 약속이다. 인터스텔라의 진짜 엔진은 중력 방정식이 아니라 그 약속이다. 오디세우스가 20년을 헤매며 향하는 곳도 결국 페넬로페와, 아버지 얼굴을 모른 채 자란 아들 텔레마코스다. 오펜하이머만이 예외처럼 보이지만 — 그가 잃은 것 역시 트리니티 이전으로, 무언가를 보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집이다.

그러니까 프로메테우스와 ‘돌아오는 아버지’는 두 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의 앞뒷면이다. 불을 훔치는 행위와 집에서 멀어지는 행위가 같은 동작이다. 세계의 비밀에 손을 뻗는 순간, 그 손은 이미 아이의 손을 놓고 있다. 훔침이 곧 유배다.

인터스텔라가 이 둘을 가장 노골적으로 겹쳐 보여준다. 쿠퍼는 중력을 훔치는 바로 그 행위로 딸에게 신호를 보낸다. 불을 훔치는 손과 집으로 손을 뻗는 손이 문자 그대로 같은 손이다. 놀란은 이미 10년 전에 자기 주제를 다 말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시간 기믹에 정신이 팔려 못 봤을 뿐.

놀란은 왜 이 이야기만 하는가

이게 놀란 개인의 강박이라는 정황도 있다. 맷 데이먼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도 영화 촬영으로 아이들과 떨어져 있던 시기에 이 책을 읽었다고 했다. 자식의 유년기를 통째로 놓친 아버지의 이야기였다고. 그래서 놀란에게 전화해 대체 이 소재와 무슨 관계냐고 물었더니, 놀란은 부정하지 않고 그저 슬쩍 웃었다고 한다. 그 웃음이 사실상의 긍정이다.

놀란도 영화를 만드느라 오래 집을 비우는 아버지다. 세계에 무언가 거대한 것을 가져다주는 일과, 그 대가로 아이 곁을 비우는 일. 어쩌면 그는 자기 직업의 구조를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반복해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창작이라는 이름의 불을 훔쳐 오는 자, 그리고 그만큼 집에서 멀어지는 자.

트릭은 애초에 요점이 아니었다

우리는 놀란을 ‘시간을 꼬는 감독’으로 알아왔다. 꿈의 층위, 시간 팽창, 엔트로피 역행. 「오펜하이머」의 컬러/흑백 교차편집도 그 연장선처럼 보였고, 나 역시 처음엔 그 시간대를 퍼즐처럼 풀려다 몇 번 미끄러졌다.

그런데 「오디세이」에서 그 트릭은 거의 사라진다. 오디세이아는 호메로스부터 이미 비선형이라, 놀란이 교차편집을 써도 그건 ‘놀란의 장치’가 아니라 ‘원전의 구조’다. 3천 년 전부터 다들 알던 방식이라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벤허」나 「마지막 황제」처럼 편하게 봤다. 헷갈릴 게 없었다.

그리고 트릭이 걷히자, 그 밑에 늘 있던 것이 드러났다. 시간 퍼즐은 껍데기였다. 진짜 서명은 세계의 비밀을 훔쳐 와 그 대가로 집을 잃는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그럼에도 돌아가려 애쓰는 아버지였다 — 둘로 나뉘지 않는 한 사람. 남들이 두 개의 테마로 나눠 적어온 그 자리에, 사실은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놀란은 그 한 얼굴을 장르만 바꿔가며 세 번 그렸을 뿐이다.

시공간을 비틀어 꼬던 감독이, 저 오랜 고전의 멋진 서사를 오히려 있는 그대로 시각화하면서 자기 특유의 과잉된 꼬기 — 솔직히 테넷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 를 스스로 걷어냈다. 그렇게 그는 이제 ‘역사’이자 ‘흥행’인, 그 드문 반열에 올라서는 듯하다. 그리고 언젠가 그랬듯, 이번에 확보한 경제적 가치로 그는 또 새롭고 더욱 거대한 도전을 할 것이다. 정말 멋진 일이다.

불을 훔친 자는 집에 닿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집을 향해 걷는다. 오디세우스가 20년을 걷듯이.

그리고 어쩌면, 실향민이 되어 끝없이 귀환을 반복하는 그 자신이야말로 — 이 프로메테우스적 축복의 시대에, 우리 가슴속으로 자꾸만 찾아드는 공허를 잠시 마취시켜 줄 새로운 예방주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